프로야구 개막과 각본없는 드라마


1982년 개막한 프로야구는 138명 6개 구단으로 시작을 알렸다.

롯데자이언츠, 삼미슈퍼스타즈, 삼성라이온즈, MBC청룡, OB베어스, 해태타이거즈로 구성된 프로야구는

20명 규모의 선수단으로 시작되었다.


개막식은 MBC청룡과 삼성라이온즈의 대결

사람들은 삼성의 압도적인 승으로 예상하였다. 선수구성에서 삼성은 최강이였기에 가능하였다.

하지만, 스포츠였고 개막전이란 특성은 어느누구도 장담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백인천 감독의 회고를 보면

이런말을 하였다. "아마야구에서의 연장선으로 보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프로에 대한 시스템과 연습을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훈련도 아마식으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였다."

그랬기에 MBC청룡은 다른 팀과 달랐다. 훈련방식에 있어서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한 백인천 감독이 이끌고 훈련했기에 다른팀보다 강했다. 이만수의 홈런 안타 등에 힘입어 삼성이 압도적인 경기를 이끌어 가다 백인천 감독의 홈런을 포함한 유승안의 동점홈런 등으로 승부는 원점. 그리고 10회말 2사 1.3루에서 백인천이 등장한다. 삼성은 백인천 감독을 고의사구로 내보내고 만루를 만들었다.

타석엔 6번 이종도 선수.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백인천 감독겸 선수가 걸어나가 실망이 컷을때 이종도 선수는 아무도 예상못한 만루홈련을 때려낸다. 이것이 프로야구 개막전에 나온 첫 끝내기 만루홈런이자 프로야구 첫 승의 기록이 되었다.

국민들은 열광했다. 선수도 프로를 인식하지 못한 상황에서 국민들 또한 그러했는데, 첫경기가 드라마인 경기를 보고 야구장으로 몰리게 된 것이다. "이것이 프로야구구나"라는 인식이 생기며 프로야구는 첫 경기부터 흥행할 수 밖에 없는 단추를 끼게 되었다.

최강라이벌의 등장과 스타


라이벌은 스포츠의 흥행수표이다. 라이벌은 관심을 극대화 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기대감을 가지게 한다.

그것이 팀의 라이벌일 수도 있고, 선수간의 라이벌일 수도 있다. 팀으로는 보스턴과 뉴욕양키즈를 말할 수 있고, 국가간으론 대한민국과 일본을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선수로는?

대한민국의 최강 라이벌은 영화로도 나온 최동원과 선동렬을 말할 수 있다.


최동원은 아마 최고의 선수였다. 경남고 시절부터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투수였고, 연대를 거처 미국을 갈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던 그였다. 개막을 앞둔 프로야구에서 최고의 몸값으로 최동원과 박철순만이 거론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었을 정도로 그는 최고의 스타였다.

선동렬은 은 최동원보다 어리지만, 포스트 에이스로 이미 정평이 나있던 국보급 투수였다. 묘하게도 선동렬과 최동원은 호남과 경남이란 지역특색에도 연결되면서 자존심을 건 라이벌로 성장하게 된다. 날카로운 제구력과 빠른 직구, 변화가 큰 변화구를 구사하는 최동원이라면, 빠른 공과 코너웍 그리고 직구와 분간하기 힘든 슬라이더로 무장한 선동렬은 무승부라는 성적표를 낼 정도로 막상막하였고, 그들이 만나 진검승부를 하는 경기는 전국적인 관심을 끌 정도로 프로야구 흥행에 최고의 보증수표였다.

프로야구가 최동원과 선동렬의 투수로 흥행 및 스타의 등장을 알렸다면, 타자로서 프로야구를 흥행시킨 인물로 장종훈을 빼놓을 수 없다. 프로야구에 20홈련이 홈런왕으로 불리던 시절, 장종훈은 강타자, 홈런타자의 대명사였다.

그가 등장하면, 홈련을 때릴꺼 같은 기대감, 그가 나타나면 해결해줄꺼 같은 해결사적 기질까지 연습생에서 프로야구 빅스타로 큰 그는 연습생신화로도 유명하다. 그가 40홈런을 치며 한국 프로야구의 또다른 신화를 쓰게 되면서 프로야구의 새로운 발전의 역사를 남겼다.

시스템 야구의 등장


프로야구가 개막하고 흥행을 이어갔지만, 시스템적으로 아마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기기 위해 선발이 구원투수로 나오고, 그때그때의 속된 표현의 "땜빵식 엔트리"가 대한민국 프로야구의 현실이였다. 이런 프로야구의 한 획을 그은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LG트윈스의 신바람야구로 불리는 자율야구의 바람이었다. 첫해 이광환 감독의 자율야구는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였다. 하지만, 2년째 되던 해의 LG는 최강의 팀이 되었다. 당시 93년 LG는 미스터LG 김상훈을 내주고, 한대화를 영입한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행보였다. 김상훈은 LG의 프랜차이즈 스타였기에 팬들은 말이 많았다. 이 카드는 94년 이광환감독의 스스템야구의 마지막 퍼즐이였음을 입증하게 된다.

94년 LG트윈스는 1선발과 5선발을 구축하고, 미들맨을 배정하였으며, 마무리 김용수까지 시스템을 갖추었다. 거기에 전문 대타요원을 비롯한 각 포지션별로 선수를 나누워서 구단을 운영하였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시스템이였으며, 사람들은 처음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94년 개막을 하면서 LG는 어느누구와 대결해도 쉽게 지지않는 최강팀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그해 한구시리즈를 거머쥐게 된다.

94년 이후 각 구단은 시스템야구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마무리투수의 세이브와 미들맨의 홀드는 중요한 선수 실력을 말하는 지표가 되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선수별 장점을 알고 보직을 배정하는 형식이 구축되며 프로야구의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박찬호의 등장과 실력의 성장


한국 프로야구가 자체적인 성장을 하고 있을 쯤, 국민들의 야구수준을 높여주는 계기가 생기게 된다. 바로 코리아특급 박찬호의 등장이다.

박찬호는 한국에서 다이렉트로 메이저리그로 진출하는 역사적인 행보를 보이며 국민적인 관심을 몰고왔다. 하지만, 신인시절 그는 마이너로 강등되며 국민적인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하지만, 마이너 생활을 견디어 내고, 다시 메이저리그로 입성한 그는 국민들의 희망으로 자리잡게 된다. 당시 IMF로 국민들에게 힘든시기를 이겨낼 원동력으로 그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그가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삼진으로 돌려세울때 마다 국민들은 환호하고 열광했으며, 그게 패했을때는 속상해하고 아쉬워 했다. 그런 그의 경기를 보며 국민들은 야구를 보는 수준이 높아지게 된다.


언제나 매경기 푸른잔디가 잘 갖추어진 그라운드, 4만명 이상을 수용하는 최신식 구장, 빠른 진행과 에러없는 깔끔한 플레이 부터, 런닝스로우로 송구하는 화려한 플레이까지, 국민들은 선진야구를 체험하며, 국내 프로팀에게도 자극을 받게 하였다.

그로인해 경기를 지연시키는 투수들의 행동 및 잦은 타임요청 등 많은 부분을 수정하는 계기가 되었고, 팬들은 그런 수준 높은 야구를 즐기게 되었다.

용병제 도입과 전력 평준화


시스템적인 발전과 개인 실력의 발전으로 한국 프로야구는 높은 인기와 관중 몰이에 성공하며 나름의 성과를 내고 있을 떄 결국 한계점에 부딧치게 된다. 전력의 지나친 편차는 프로야구 재미를 반감시키게 되었고, 팬들은 발길을 돌리게 되었다. 거기에 축구와 프로농구의 도입등 다른 스포츠의 프로화 바람이 불게 됨에 따라 야구에도 변화의 바람이 감지된다. 바로 용병제 도입이였다. 외국인 선수들은 각 팀에 필요하거나 부족한 부분을 메우는 계기가 되었고, 전력 평준화의 기틀을 마련하게 해주었다. 그중 원년 최고의 스타라고 한다면 홈런치는 강타자로 자리메김한 롯데의 호세와 우즈를 들 수 있다.

 

 

그중 우즈는 두산에서 국내 선수들과 시너지를 내며 '우동수'트리오를 형성하며 막강한 힘을 내게 된다. 우동수 트리오는 우즈, 김동주, 심정수를 칭한 명칭으로 3번부터 5번의 클린업트리오를 일컷는 말이였다. 또한 우즈는 40홈런 이상을 치며 이승엽과의 홈런 대결로도 인기를 끌게한 계기가 되었다. 그후 이 경쟁은 이승엽의 아시아 56개 홈런 신기록의 발판으로 작용하였고, 그의 신기록 공을 잡기위해 홈런석에 잠자리 채가 등장하는 등 프로야구 흥행에 한몫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원래 내야 관중석부터 차는 경기장에 홈런공을 잡기위해 홈런석부터 차는 기이한 현상도 경험하는 재미있는 일들이 생기기도 하였다.

WBC의 영광

한국야구가 국내에선 최고의 스포츠로 자리매김 하였지만, 이렇다할 국제 성적은 없었다. 청소년 야구는 선전하는 반면, 성인 국가대표는 이렇다할 타이틀이 없던 시절, 우리는 2006년 WBC를 통해 발전된 야구를 입증하게 된다. 특히 도쿄돔에서 치루어진 일본과의 경기는 국민들을 흥분과 열광의 행복감으로 몰아 넣었다. WBC를 통해 이승엽은 진정한 홈런타자로 인정받았으며, 이진영은 다이빙케치로 인해 국민우익수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그해 프로야구는 관중몰이에 성공하며 한단계 업그레이드 하게 되었다.

 

 

데이터 야구로 업그레이드

대한민국의 프로야구의 명장의 대명사는 해태의 김응룡감독이었다. 한국시리즈 9번 우승에 빛나는 그의 업적은 명장으로 불리기에 충분하였다. 이런 야구판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온 명장이 등장한다. 바로 김성근감독이다. 그는 야신으로 불리며 팬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

김성근 감독이 주목받았던 이유는 약한 선수층을 가진 팀을 강팀으로 만드는 능력에 있다. 쌍방울의 얇은 선수층으로 포스트시즌을 진출시켰으며, 6위하던 LG를 준우승으로 만드는 등 김성근 감독의 능력은 누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최고의 명장으로 등극하는 시기가 왔으니 바로 SK의 감독직을 수락하면서였다. 그의 지도하에 SK는 2000년대의 최고의 구단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각 구단의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데이터야구를 받아들이며 수비, 투수기용, 대타기용 등에 활용하며 한층 재미있는 야구를 구사하게 되었다.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대한민국 야구의 쾌거를 말한다면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을 뺴놓을 수 없다. 거기다 전승우승이란 업적도 남겼다. 이대호 이승엽 등의 클린업트리오 및 윤석민, 류현진 등의 최고투수를 앞세워 강호들을 이겨나갔다. 그리고 결승전에서는 아마 최강 쿠바를 진땀빼는 접전끝에 승리하며 국민들은 열광했다. 김경문 감독은 명장임을 입증하였고, 이대호는 해외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는 등 국내 프로야구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리고 그 기세를 앞세워 대망의 700만 관중도 돌파하게 되었다.

역사는 진행형이다. 내일 또다른 역사는 쓰여진다. 그리고 그를 통해 발전한다. 이렇게 하나하나 따저보면 프로야구는 숨막히는 역사의 연속이였으며,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의 산물이다. 최동원 선수는 최고의 선수였음에도 선수협회를 만들려는 괴씸죄로 롯데에서 삼성으로 강제 트레이드 되면서 쓸쓸한 은퇴를 하였으며, 부족한 경기장 시설로 인해 임수혁 선수는 병상에서 아직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다. 한국 최고의 스포츠이지만, 아직 부족함이 많기에 프로야구는 계속 진화하고 발전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발전을 보며 우리는 더 많이 흥분하고 행복할 것이다. 프로야구의 발전을 기대하는 이유이다.